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말년은 들꽃이다. 군함도에 끌려온 여인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말년은 잔인한 군홧발에 이리저리 채이면서도 강인한 뿌리로 땅을 부여잡고 제 색을 잃지 않는다. 이정현도 들꽃이다. 가냘픈 체구에 얼핏 한없이 여린 듯 보이지만 형형한 눈빛 안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에너지가 들끓고 있다. <명량>(2014)의 정씨부인이 한 맺힌 몸짓으로 치맛자락을 펄럭이는 단 한 장면만으로 온전히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<군함도>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. 말년이란 캐릭터의 슬픔인지, 이정현이란 배우의 위력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다. 이정현은 애초에 두 가지를 나눌 필요 없는 영역에서 숨 쉬는 배우다.

 

 

-민감한 소재이고 어려운 이야기다. 출연을 고민하진 않았는지.

=캐스팅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를 읽은 지 한 시간 만에 바로 출연을 결심했다. 아니 사실 출연 제안을 받은 순간부터 하고 싶었다. 주차장에서 <군함도>라는 이야기를 듣고 좋아서 고함을 질렀으니까. 류승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황정민 배우가 출연한다는데 고민 같은 건 사치 아닐까? (웃음)

 

-시나리오와 실제 현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일치했나.

=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머릿속에 상상했던 그림보다 더 알차고 생생한 이미지로 나왔다. 현장에서 촬영을 할 때마다 대형 스크린에 화면을 띄워 배우들에게 어떻게 찍혔는지 보여주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. 이렇게 자세히, 함께 호흡하는 현장은 정말 귀하고 드물다. 세트장에 처음 갔을 때 그냥 군함도를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았다. 사실 특정 장면들은 CG를 쓸 수도 있고, 제작하는 입장에선 그게 훨씬 편했을 텐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실제로 만들었다. 분장, 촬영, 조명, 미술 모든 스탭들이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한 현장이었다. 배우로서 이 정도로 친절하게 준비된 상황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.

 

-친절하다는 표현이 재미있다. 육체적으로 매우 버거운 현장이란 소문이 무성했는데.

=몸은 당연히 힘들었다. 다만 현장에서는 그걸 느낄 새도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.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 온몸에 크고 작은 멍들이 생겨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그런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. 아니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즐거웠다. 상황이 완벽하니 본능적으로 연기하게 되는, 자연스러운 반응이랄까. 가령 당시 군함도에 끌려온 강제징용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 중 하나가 굶주림이었는데, 감독님이 그걸 나한테는 따로 주문하지 않으셨다. 그런데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어느새 나도 함께 말라가고 있었다.

 

-즐거웠다는 단어를 유난히 자주 쓰는 것 같다.

=촬영 하루 이틀 전에 내려가서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. 분위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. 하루 8시간이라는 촬영시간이 철저히 지켜진 현장이었기 때문에 분장시간을 빼면 실제로 찍을 수 있는 시간이 4~6시간밖에 되지 않았다. 하루에 한두 테이크밖에 못 찍는 경우도 많았고, 롱테이크가 많아 주연배우는 물론 보조 출연자들과의 호흡도 중요했다. 다행스러운 건 100명이 넘는 보조 출연자들이 모두 연기에 열정이 넘치는 분들이셨고, 주연과 다를 바 없는 위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. 그 분위기에 녹아들고 싶어 항상 일찍 가고 늦게 왔다. (웃음)

 

-말년은 여리지만 강인한 여성이다. <명량>의 정씨 부인, <성실한 나라의 앨리스>(2014)의 수남 등 약해 보여도 강인한 캐릭터들을 주로 맡아왔다.

=감독님들에겐 그런 부분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. 스스로 특별히 의식하는 건 없다.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은 건 배우로서 당연한 욕망이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이미지를 피하고 싶지도 않다.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면 좋겠다. 멜로도 잘할 수 있고 이제는 진한 로맨스도 해보고 싶다. (웃음)

 

-말년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연기도 있다던데.

=원래는 서울말을 쓰는 캐릭터였는데 감독님에게 제안해서 사투리로 고쳤다. 괜히 했다 싶을 만큼 정말 고생했다. 또 하나, 욕을 진짜 많이 한다. (웃음) 욕쟁이 할머니처럼 욕의 맛을 살려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자주 혼났다. 욕 선생님까지 구해서 따로 배웠다. 감독님이 욕에 대해서는 워낙 일가견이 있으니까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. 이젠 진짜 잘한다. (웃음)

 

-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민감한 소재이기도 하다. 본인에게 <군함도>는 어떤 영화인가.

=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모두가 봐야 하고 기억해야 할 영화다. 덧붙여 류승완 감독님은 거친 남자영화만 잘 만든다는 오해가 있는데 정말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. 그의 부드러운 일면도 확인할 수 있을 거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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